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정권 (문단 편집) == 76호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왕징웨이 정권 76호실 정문.jpg|width=100%]]}}}|| || 76호실의 정문 ||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 특공총부(中国国民党中央执行委员会特务委员会特工总部).''' 약칭 '''76호실(76号, Jessfield 76, No. 76)'''은 왕징웨이 정권의 특무기관이었다. [[장제스]]의 특무기관인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國民政府軍事委員會調查統計局, Bureau of Investigation and Statistics)과 대결했으며, 76호실은 원래 상하이의 No. 67 Daxi Road에 위치해 있었으나 이후 규모가 커지자 Lane 95, No. 10을 거쳐 최종적으로 No. 76 Jisfeier Road으로 이전하였기에 이러한 약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939년 9월 5일 국민당은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를 설립하도록 결의했고, 주임위원으로 [[저우포하이]], 부주임위원으로 [[딩모춘]], 리스췬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특무위원회 산하에는 특공총부를 신설했고 특공총부의 주임으로 딩모춘을, 부주임으로는 리스췬과 탕후이민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딩모춘이 축출되자 리스췬이 특공총부 주임 자리에 앉아 76호실을 영도하게 된다. 특공총부는 항일인사, 공산당원과 충칭의 국민당 인물을 고문했다. 또한 가로등에 사람 머리를 매달거나, 남의 집에 사람의 손과 발을 던지고 총알이 든 편지를 부치거나 협박편지를 보내어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76호실이 행한 암살·납치 건수는 3,000여 건에 달했다고 한다. 76호실의 전체 인원은 약 1,800명이었으며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76호실이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면 먼저 일본 특무기관에 알려야 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감독 하에 실시해야 했다. 한편 특공총부 주임 리스췬은 권력이 커지자 점차 일본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9월 리스췬은 저우포하이의 사주를 받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독살당했고, 이후 지도자를 잃은 76호실은 권력 다툼을 벌이다 군사위원회 정치보위총국에 통합되었고 점차 권력이 약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